어떤 사람이 물었다. “부(簿)는 현령을 보좌하는 자입니다. 부가 하고자 하는 바를 현령이 혹시 따르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이천 정이(程頤) 선생이 말하였다. “마땅히 성의(誠意)로써 현령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지금 현령과 부가 화목하지 않은 것은 곧 사사로운 마음을 다투는 것입니다. 현령은 고을의 우두머리입니다. 〈부가〉 만약 부형을 섬기는 도리로 현령을 섬길 수 있어서, 허물은 자신에게 돌리고, 잘한 것은 오직 현령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런 성의를 〈현령에게〉 쌓는다면, 어찌 사람을 움직여 〈마음을〉 얻지 못함이 있겠습니까?”
둘째. 구습을 고치는 것에 대한 글: 사람이 비록 배움에 뜻이 있는데도 용감하게 나아가고 곧게 전진하여 성취하는 바가 있을 수 없는 것은 구습이 성취를 좌절시킨 까닭[所以]이 있다. 구습의 항목을 왼쪽과 같이 조목별로 열거하니 만약 마음을 다하여 〈구습을〉 철저하게 끊어내지 않는다면 끝내 학문을 하는 바탕이 없을 것이다.
자기의 〈사욕을〉 이기는 공부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절실하니, 이른바 ‘기(己)’라는 것은 내 마음이 좋아하는 바가 천리에 부합(符合)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반드시 모름지기 ‘내 마음이 여색을 좋아하는가, 이익을 좋아하는가, 명예를 좋아하는가, 벼슬살이를 좋아하는가, 편안함을 좋아하는가, 주연의 즐거움을 좋아하는가, 귀한 보배를 좋아하는가’를 검속하고 살펴서, 무릇 여러 좋아하는 바가 만약 천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일절 통렬히 끊어서 싹과 줄기를 남겨두지 않은 뒤에야, 내 마음이 좋아하는 바가 비로소 의리에 있게 되어서, 이길 만한 사욕이 없을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도를 향하여 외물이 이기는 바가 되어선 안 되니, 외물이 바르지 못한 것을 응당 일체 마음에 머물게 하지 말아서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곳에 만일 장기, 바둑, 주사위 등의 놀이를 벌여 놓으면 응당 눈을 붙이지 말아서 뒷걸음질 쳐서 이끌어 물러나고, 만일 광대와 기생이 가무를 행하는 것을 만나면 반드시 모름지기 피하여 떠나야 하고, 만일 마을 안의 큰 모임을 만나서 혹시 존귀하고 나이 많은 이가 억지로 만류하여 피하고 물러갈 수 없으면 비록 자리에 있더라도 용모를 단정히 하고 마음을 맑게 하여 간사한 소리와 음란한 색이 나를 침범함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무릇 책을 읽는 사람은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바르게 앉아서, 공경히 책을 대하여 마음을 오로지 하고 뜻을 다하여, 생각을 정밀히 하고 깊이 잠겨서 뜻과 취지를 깊이 이해하고, 구절마다 반드시 실천하는 방법을 구해야 하니, 만약 입으로 읽기만 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지 않고, 몸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책은 따로 책이고 나는 따로 나일 것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무릇 부모를 섬기는 자는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행동도 감히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말고 반드시 명을 여쭈고 난 뒤에 행해야 한다. 만약 일 가운데 할 만한 것을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반드시 자세하게 말하여 고개를 끄덕여 승락한 뒤에 행하고, 만약 끝내 허락하지 않으면 또한 곧장 제 뜻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부모에게 양육되고, 자기 힘으로 제 부모를 봉양할 수 없으니, 이처럼 문득 세월을 보낸다면 끝내 정성으로 봉양할 때가 없을 것이다. 반드시 몸소 집안일을 맡아서 스스로 맛있는 음식을 마련한 뒤에 자식의 직분이 비로소 수행된다. 만약 부모가 완강하게 잘 따라주지 않으시면 비록 집안일을 맡을 수 없더라도 또한 마땅히 두루 힘써 보조하여 힘을 다해 맛있는 음식을 얻어서 어버이의 입에 맞춰드리는 것이 옳다. 만약 마음마다 생각마다 어버이를 봉양하는 데에 있다면 진미를 또한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늘 생각하되, ‘왕연(王延)은 추위가 지독한 겨울날 매서운 추위에 스스로는 온전한 옷이 없었는데 어버이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지극히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게 하는구나.’ 하여야 한다.
부모의 뜻이 만약 의리에 해로운 것이 아니면 마땅히 〈부모의〉 뜻을 미리 〈알아〉 받들어 따라서 작은 것이라도 어겨서는 안 된다. 만약 부모의 뜻이 이치에 해로운 것이면 기운을 온화하게 하고 얼굴빛을 화하게 하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간하고, 반복하고 개진하여 반드시 따라주실 것을 기약해야 한다.
어버이의 상례에서, 성복하기 전에는 곡하고 우는 것을 입에서 끊이지 않게 해야 하고, 장사 지내기 전에 곡에 정해진 때 없이 슬픔이 지극하면 곡을 하며, 졸곡 뒤에는 아침저녁으로 두 차례만 곡할 뿐이다. 예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이와 같지만, 만약 효자의 마음이 지극하다면 곡하고 우는 것이 어찌 정해진 수가 있겠는가? 무릇 초상은 슬픔이 부족하고 예가 충분한 것보다는 예가 부족하더라도 슬픔이 충분함 만 못하니, 상례는 자식의 슬픔과 공경을 다 함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무릇 상복을 입어야 하는 친척의 상에, 만약 타지에서 부고를 들으면 신위를 설치하고 곡 해야 하니, 만약 상례에 달려가면 집에 이르러서 성복하고 만약 상례에 달려가지 못하면 4일 만에 상복을 입는다. 만약 1년의 자최의 복을 입는 경우라면, 아직 성복하기 전 사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신위를 설치하고 모여 곡한다.
스승과 벗 중에 의리가 중한 자와 친척 중에 복 입는 예가 없으면서 정이 두터운 자와 무릇 친구 중에 교분이 친밀한 자는 모두 상을 들은 날에 만약 길이 멀어 그 상에 찾아갈 수 없으면 신위를 설치하고 곡한다. 스승이라면 그 인정과 의리의 깊이를 따라서, 혹 심상 3년, 혹 1년, 혹 9개월, 혹 5개월, 혹 3개월 복을 입고, 친구라면 비록 가장 중하더라도 3개월을 넘기지 않는다. 만약 스승의 상에 3년이나 1년을 행하고자 하는 자가 상에 달려갈 수 없으면,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신위를 설치하고 곡하여, 4일 째에 그친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의 두 예는 가장 자식이 정성을 다할 곳이다. 이미 돌아가신 부모를 쫓아 봉양할 수 없으니, 만약 상례에서 자신의 예를 다하고, 제사에서 자신의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끝나는 아픔을 맡길 만한 일이 없고, 쏟아낼 만한 때가 없으니, 자식의 마음에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증자가 말하길, “부모의 상을 삼가고 먼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한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니, 자식 된 자가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요즘 세속에 대부분 예를 알지 못하여, 그 제를 행하는 의식이 집집마다 같지 않으니, 매우 웃을 만하다. 만약 한결같이 예로써 의식을 통일하지 않는다면, 끝내 문란하고 순서가 없어져서 오랑캐의 풍속으로 돌아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에 제례를 뽑아서 뒤에 덧붙이고, 또 그것을 그림을 그렸으니, 반드시 자세히 살펴서 따라 행하되, 그러나 만약 부형이 원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간곡하게 말하여 바른 예로 돌아가기를 기약해야 한다.
형제는 부모가 남겨준 몸을 함께 받았으니, 나와 한 몸과 같다. 형제를 볼 때 마땅히 서로의 구분이 없게 하여, 음식과 의복의 가진 것을 모두 마땅히 함께해야 한다. 만약 형은 굶는데 동생은 배불리 먹고, 동생은 추운데 형은 따뜻하다면, 이는 한 몸의 안에서 몸의 어느 부분은 병들고 어느 부분은 건강한 것이니, 몸과 마음이 어찌 한쪽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형제를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 부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같은 부모의 자식을 사랑하지 아니 할 수 있겠는가? 형제가 만약 좋지 않은 행실이 있다면, 마땅히 정성을 계속하여 충심으로 간하여, 마땅히 점차 이치로서 깨우쳐서 〈형제가〉 감동 되어 깨우치기를 기약해야 하고, 갑자기 노여운 얼굴과 거슬리는 말을 건네서 형제간의 화목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학자들은 겉으로는 비록 몸가짐을 조심하면서도 속으로는 독실한 자가 드물어서, 부부의 사이, 이부자리의 위에서 대부분 정욕(情慾)을 풀어놓아서 스스로 위엄(威嚴)을 잃는다. 그러므로 부부가 서로 허물없이 행동하지 않고 서로 공경할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으니, 이와 같이하면서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바르게 하고자 하면, 또 어렵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남편은 온화하면서 의(義)로써 제어하고, 아내는 유순하면서 바른 도리로써 받들어서, 부부의 사이에 예의와 공경을 잃지 않은 뒤에, 집안일이 다스려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예전처럼 서로 허물없이 지내면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서로 공경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형편상 행해지기 어려우니, 모름지기 아내와 서로 경계하여 반드시 옛 습관을 버리고, 점차 예(禮)에 들어가는 것이 옳다. 아내가 만약 나의 발언과 몸가짐이 한결같이 바른 도리에서 나오는 것을 본다면, 반드시 점차 서로 믿어서 순종할 것이다.
자식을 낳으면, 아는 것이 조금 생길 때부터 마땅히 자식을 선으로 인도해야 하니, 만일 어려서 가르치지 않으면, 이미 장성함에 이르러서는, 곧 나쁜 것을 익히고 마음을 풀어놓아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 매우 어려우니, 자식을 가르치는 차례는 마땅히 《소학(小學)》을 따라야 한다. 대체로 한 집안의 안에 예법이 성행하고, 책을 엮고 글씨 쓰기의 외에 다른 잡기가 없으면, 자제들 또한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서 배움을 저버리는 근심이 없을 것이다. 형제의 자식은 나의 자식과 같으니, 그 조카를 사랑하는 것, 그 조카를 가르치는 것을 마땅히 동일해야 하고, 가볍게 하거나 중하게 하고, 후하게 하거나 박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집안을 다스릴 때, 마땅히 예법으로 안과 밖을 구별하여, 비록 하인이라도 남자와 여자를 섞어 살아서는 안 된다. 남자 하인은 명한 것이 없으면, 멋대로 안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여자 하인은 모두 마땅히 정해진 남편이 두 게 하여, 음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음란함을 그치지 않는 자는 마땅히 내쫓아서 따로 살게 하여 가풍을 더럽히게 해서는 안 된다. 하인들을 마땅히 화목하게 하여, 만약 다투고 떠드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금지와 제재를 통렬히 가해야 한다.
군자는 도를 근심하고, 가난을 근심해서는 안 된다. 다만 집이 가난하여 의지하여 살 수 없으면, 비록 마땅히 가난을 구제할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만, 또한 단지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면 될 뿐이지, 재물을 쌓아두고 풍족하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또 세상의 비루한 일을 가슴속에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옛날의 은자는 신발을 삼아서 먹고사는 자, 나무를 하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생활하는 자, 지팡이를 꽂아 두고 김을 매는 자가 있었지만, 이런 무리의 사람들은 부귀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것에서 편안할 수 있었다. 만약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지고 풍족함과 가난함을 계산하는 생각이 있다면, 어찌 마음 수양의 해가 되지 않겠는가?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부귀를 가볍게 여기고 빈천을 지킬 것을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집에서 생활할 때, 가난하면 꼭 가난에 곤궁해져서, 제 지킬 바를 잃는 자가 많으니, 배우는 자는 바로 이점에 마음을 써야 한다. 옛사람이 말하길, “곤궁할 때 그가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가난할 때 그가 취하지 않는 것을 본다.”고 하였고, 공자가 말하길, “소인은 가난하면 넘친다” 하였다. 만약 가난함에 움직여서 의를 행할 수 없다면, 학문을 어디에 쓰겠는가? 무릇 사양하고 받고 가지고 주는 때에 반드시 의인지와 의가 아닌지를 정밀하게 생각하여 의로우면 그것을 가지고, 의롭지 않으면 가지지 않아서 터럭만큼도 지나쳐서는 안 된다.
만약 대단한 악인이어서 마음에 깔보고 미워하는 사람이면, 그의 선물이 비록 명분이 있더라도, 받는 것이 마음이 반드시 편안하지 않을 것이니,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면, 억지로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 맹자가 말하길, “그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며, 그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 하니, 이것이 의를 행하는 방법이다.
중국에는 고을의 수령에게 사사로운 녹봉이 있다. 그러므로 그 나머지를 옮겨서 남의 급한 일을 도울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수령에게 따로 사사로운 녹봉이 없고, 다만 공적인 곡식으로 일상의 수요에 대응한다. 그런데 만약 사사로이 다른 사람에게 준다면 곧 많고 적음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죄에 따른 견책이 있다. 심하면 장물죄 까지 이르고, 받은 자도 그렇게 된다. 선비가 되어 수령의 선물을 받으면, 이는 곧 금령을 어기는 것이다. 옛날에는 나라에 들어갈 때에 법으로 금하는 것을 물었으니, 그 나라에 사는 사람이 어찌 금령을 범할 수 있겠는가? 수령의 선물은 대개 받기가 어려운 것이니, 만약 국고의 곡식을 사로이 준다면, 사람이 친한지 소원한지, 명분이 있는지 없는지, 물건이 많은지 적은지를 따지지 않고, 모두 받아서는 안 된다.
벗을 고를 때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고 선을 좋아하고 바르고 엄하며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을 가려서, 그와 같이 지내면서 타이름과 경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서, 나의 결점을 다스려야 한다. 만약 벗이 게으르고 놀기를 좋아하며 유약하고 아첨하며 바르지 못한 자이면 사귀어서는 안 된다.
고을 사람 중에 선한 사람은 반드시 친근하게 하여 정을 통해야 하고, 고을 사람 중에 선하지 않은 사람도 나쁜 말로 그의 비루한 행실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다만 대하기를 예사롭게 하여 서로 왕래하지 말아야 하니, 만약 전날에 서로 아는 사람이면, 서로 만났을 때 다만 안부만 나누고 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는다면, 당연히 점차 소원해져서, 또한 원망하고 노여워하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찾는다. 만약 내가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나는 반드시 학문하는 선비를 구할 것이고, 학문하는 선비도 반드시 나를 구할 것이다. 저 명색에 학문한다지만, 뜰에 쓸데없는 손님이 많아서 떠들썩하게 날을 보내는 자는 분명 그가 즐기는 것이 학문에 있지 않은 까닭이다.
사람 중에 나를 헐뜯고 비방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돌이켜서 스스로 살펴야 한다. 만약 나에게 실제로 헐뜯을 만한 행실이 있다면, 스스로 뉘우치고 속마음으로 책망하여 허물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하고, 만약 나의 잘못이 매우 작은데도 더하고 늘리고 보탠다면, 저 사람의 말이 비록 지나치지만, 나에게 실제로 비방을 받을 실마리가 있는 것이니, 또한 마땅히 전날의 잘못을 깎아 없애서 털끝만큼도 남겨두지 말야야 하고, 만약 나에게 본래 허물이 없는데도 거짓말을 날조했다면, 이것은 망령된 사람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 망령된 사람과 어찌 거짓과 진실을 따질 수 있겠는가? 또 저 사람의 거짓된 훼방은 바람이 귀를 스치고 구름이 허공을 떠가는 것과 같으니 나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무릇 이와 같이 한다면, 훼방이 올 때, 〈허물이〉 있으면 허물을 고치고, 〈허물이〉 없으면 〈스스로〉 더욱 힘쓴다면, 나에게 유익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마을 사람과 함께 거처할 때, 비록 물음에 따라 대답하되, 끝내 비루하고 더러운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비록 장엄하게 스스로 지키되, 절대로 자랑하고 높은 체 하는 기색을 가져서는 안 되고, 오직 마땅히 좋은 말로 타이르고 이끌어서, 반드시 인도하여 학문에 향하도록 하고자 하고, 어린아이와 함께 거처할 때, 마땅히 효제충신을 간곡하게 말해주어, 착한 마음을 일으키게 해야 하니,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마을의 풍속이 점차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선비 된 자는 옛사람같이 부모를 위하여 수고로움을 맡아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고, 다만 과거 공부라는 한 가지 일이 부모의 마음에 바라는 바라 하여, 이제 이미 공부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거 공부가 비록 성리학과 다르지만, 역시 앉아서 책을 읽고 글을 짓는 것이라, 그 몸소 밭 갈고 다니며 품팔이하고 쌀을 등지는 것보다 편리한 것이 백 배일뿐만 아니다. 하물며 여가가 있어 성리학의 책을 읽을 수 있음에랴? 다만 과거 공부를 하는 자는 으레 성공과 실패에 동요되어, 마음이 항상 조급히 다투니, 〈과거 공부가〉 도리어 마음을 해치지 않으려는 노력만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현이 말하길, “학문에 방해될까 걱정하지 않고, 오직 뜻을 빼앗길까 걱정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그 일을 하면서도 그 지킴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과거 공부와 이학 공부가 함께 행해지더라도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사람은 명분으로는 과거 공부를 한다 말하지만 실제로는 공을 이루지 않고, 명분으로는 성리학을 한다 말하지만 실제로는 손을 대지 않는다. 만약 과거 공부로서 책망하면 말하기를, “내가 성리학에 뜻을 두고 있어서 과거에 전념할 수 없다.” 하고, 만약 성리학으로 책망하면 말하기를, “나는 과거 공부에 얽매여서, 실지에 힘을 쓸 수 없다.” 한다. 이처럼 양쪽으로 편리한 점을 살펴서 한가롭게 날을 보내다가, 끝내 과거 공부와 성리학의 양쪽 〈모두〉 이룬 바가 없는 데에 이르게 되니, 늙은 뒤에 비록 후회하더라도 어찌 따라잡겠는가? 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벼슬하지 않을 때에는 오직 벼슬하는 것을 급히 여기고 벼슬한 뒤에는 다시 벼슬을 잃을까 염려한다. 이처럼 골몰하다가 그 본심을 잃은 사람이 많으니, 어찌 두려워할 만하지 않겠는가? 지위가 높은 사람은 도를 행하는 것을 주장하니, 도를 행할 수 없으면 물러나는 것이 옳다. 만약 집안이 가난하여 녹을 받는 벼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반드시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에 나아가며, 높은 지위는 사양하고 낮은 벼슬에 머물러서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뿐이다. 비록 녹을 받는 벼슬이라 말하지만, 또한 마땅히 청렴하고 부지런히 공무에 힘써서 자기 직무를 다해야 하고, 관직을 버려두고서 먹고 마셔서는 안 된다.
며느리는 혹자[친정 형제]가 자신에게 음식, 옷, 베와 비단, 수건, 향초를 주면 받아서 시부모에게 드려야 하니, 시부모가 그것을 받으시면 기뻐하여, 새롭게 주신 것을 받은 듯이 하고, 만약 그것을 돌려 주시면 사양하되, 허락을 받지 못하면 다시 주신 것을 받은 듯이 하여 보관해두고 〈시부모가〉 부족할 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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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使人於君所어든則必朝服而命之하고 使者反이어든 則必下堂而受命이니라<小學, 明倫第二>
만약 임금이 계신 곳에 사람을 심부름 보내게 되면 반드시 조복을 입고서 (그에게) 명하며, 심부름 보낸 자가 돌아오면 반드시 대청으로 내려가서 명을 받는다.
맹자가 말하였다. 증자가 증석을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가 있었는데, 장차 물리려 할 때 반드시 줄 곳을 청하여 남은 것이 있는지 물으면 반드시 ‘있다‘고 말하였다. 증석이 죽자, 증원이 증자를 봉양하기를 반드시 술과 고기가 있었는데, 장차 물리려 할 때 줄 곳을 청하지 않았으며, 남은 것이 있는지 물으면 말하기를 ‘없다‘고 하였다. 이것을 다시 올리려는 것이었으니, 이는 입과 몸을 봉양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만약 증자와 같이한다면 뜻을 봉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당나라 영공 이적은 귀하기가 복야가 되었는데도 그 누이가 병을 앓으면 반드시 직접 〈누이를〉 위하여 불을 피워 죽을 끓였다. 불에 그 수염을 태우자 누이가 말하였다. “종과 첩이 많다. 무엇 때문에 스스로 고생하는 것이 이와 같은가? 이적이 말하였다. “어찌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는가? 다만 지금 누이의 나이가 늙었고 저(적) 또한 늙었으니 비록 자주 누님을 위하여 죽을 끓이고 싶어도, 다시 할 수 있겠는가?”
〈맹자가〉 말하였다. “왕은 백성이 왕을 아낀다고 여기는 점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양〉 으로 큰 소를 바꾸었으니, 저들이 어찌 왕의 뜻을 알겠습니까? 왕이 만약 그 죄가 없으면서도 사지로 나아가는 것을 측은히 여기셨다면, 소, 양을 어찌 택하였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게 진실로 무슨 마음이었던가? 내가 그 재물을 아껴서 소를 양으로 바꾼 것이 아니었으나, 당연히 백성은 내가 아낀다 말했겠습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왕은 백성이 왕을 아낀다고 여기는 점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양〉 으로 큰 소를 바꾸었으니, 저들이 어찌 왕의 뜻을 알겠습니까? 왕이 만약 그 죄가 없으면서도 사지로 나아가는 것을 측은히 여기셨다면, 소, 양을 어찌 택하였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게 진실로 무슨 마음이었던가? 내가 그 재물을 아껴서 소를 양으로 바꾼 것이 아니었으나, 당연히 백성은 내가 아낀다 말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