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조기장, 피는 제사에 제물로 바치는 것이고, 콩, 보리의 곡식은 또한 사람의 목숨을 기르는 물건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온갖 풀의 가운데 곡물을 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서리와 눈이 범하여도 시들지 않고, 사계절을 지내도 항상 봄날인 것은 소나무와 잣나무이다. 뭇 나무의 가운데 소나무와 잣나무가 가장 귀하다.
당나라 양성이 국자사업이 되어서 제생을 불러 (그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무릇 배운다는 것은 충과 효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제생중에 오랫동안 부모를 살피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였다. 다음날 양성을 뵙고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려는 사람이 20명이었다. 3년 동안 돌아가 (부모를) 모시지 않는 사람이 있자 (그를) 내쫓았다.
안정선생 호원은 자가 익지이다. 수나라와 당나라 이래로 벼슬에 나아가는 자들이 문장을 숭상하고 경학을 버려서 구차히 녹봉과 이익에 달려갈 것을 걱정하였다. 소주와 호주 두 주의 교수가 됨에 이르러서는 조약을 엄격히 하여 자신으로 (그것을) 솔선하여, 비록 크게 덥더라도 반드시 종일토록 공복을 입고서 제생들을 만나서 스승과 제자의 예를 엄격히 하였으며, 경전을 풀이할 때 중요한 뜻이 있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간곡하게 제생을 위하여 그 자신을 다스린 이후에 남을 다스리게 되는 까닭을 말해주었다. 배우는 무리가 천 명이었는데 날마다 달마다 갈고 연마하여 문장을 짓되 모두 경서의 뜻에 따라서 반드시 이치로써 우세하게 하였으며 그 스승의 학설을 믿어 행실을 도타이 숭상하였다. 후에 태학(의 관원)이 되어서는 사방이 (그곳에) 모여들어 상사에 수용할 수 없었다
그 도는 반드시 인륜에서 근본 하여 사물의 이치를 밝게 하며 그 가르침은 소학의 쇄소응대로부터 이후로 그 효제충신을 닦으며 예악을 주선하는 것이다. 그 이끌어 도와주고 격려하며 점차 연마하여 성취하는 바의 도는 모두 절도와 순서가 있어야 하니 그 요점은 선을 택하고 몸을 닦아 천하를 교화하여 이루는 것에 이르고, 향인으로부터 하여 성인에 이를 수 있는 도에 달려있다.
《소학(小學)》은 무엇 때문에 쓰여졌는가? 옛날의 사람들은 태어나 겨우 팔 세가 되면 반드시 이 책을 받았으니, 곧 〈하(夏)·은(殷)·주(周)〉 삼대의 시절에 사람을 가르치던 방법이었다. 진나라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래로 경전이 온통 사라져서 보존된 것이 드물었으니, 이는 신안 주자가 세상의 가르침이 해이해짐에 분개하여 옛 전적과 이야기를 모아서 후학을 깨우치고자 한 것이었다.
나의 노인을 노인으로 섬겨서 남의 노인에게 미치며, 내 아이를 아이로 대해서 남의 아이에게 미치면, 천하를 손바닥에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시경》 〈사제(思齊)〉에 이르길, ‘내 처를 본으로 삼아서, 형제에게 이르러서 집과 나라를 다스린다.’ 하니, 이 마음을 들어서 저것에 베풀 뿐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미루어 보면 그것으로써 사해를 보전할 수 있고, 은혜를 미루어 보지 않으면 처자식조차 보호할 수 없으니, 옛날의 사람이 남보다 크게 뛰어넘는 까닭은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그 해야 할 것을 잘 미루어 갔을 뿐입니다. 지금 〈왕의〉 은혜가 충분하게 금수에게 미치면서도 공이 백성에게 이르지 않는 것은 유독 어째서입니까?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만일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면 모두 두려워하고 측은해 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는 것이 아니며, 그것으로 향당과 벗들에게 명예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며, 비난하는 소리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비록 사람에게 있는 것인들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겠는가? 사람이 스스로의 양심(良心)을 잃은 까닭은 또한 도끼가 나무를 를 만나면 날마다 나무를 베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산이〉 아름답게 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 밤낮의 자라는 바와 새벽의 기운에, 그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본성이〉 다른 사람과 서로 가까운 것이 거의 없는데, 곧 그 낮에 행동하는 것이 본성을 구속하여 없앰이 있으니, 구속을 반복하면 그 밤 기운이 보존되는 것이 충분하지 않고, 밤 기운이 보존되는 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그 금수와 거리가 멀지 않으니, 사람이 그 금수를 보고서 ‘일찍이 그 사람에게 재질이 없었다’ 여길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본 모습이겠는가?
이때 이후로 속유(俗儒)의 기송(記誦)·사장(詞章)의 학습은 그 공이 소학(小學)보다 배가 되나 쓸모가 없었고, 이단의 허무(虛無)·적멸(寂滅)의 가르침은 그 고상(高尙)함이 대학(大學)보다 지나치나 실제가 없었고, 기타 권모술수(權謀術數) 일체로써 공명(功名)을 이루려는 학설과 저 백가(百家)·중지(衆技)의 무리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여 인의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 것[所以]들이 또 어지럽게 그들 사이에서 뒤섞여 나왔다.
나의 노인을 노인으로 섬겨서 남의 노인에게 미치며, 내 아이를 아이로 대해서 남의 아이에게 미치면, 천하를 손바닥에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시경》 〈사제(思齊)〉에 이르길, ‘내 처를 본으로 삼아서, 형제에게 이르러서 집과 나라를 다스린다.’ 하니, 이 마음을 들어서 저것에 베풀 뿐임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미루어 보면 그것으로써 사해를 보전할 수 있고, 은혜를 미루어 보지 않으면 처자식조차 보호할 수 없으니, 옛날의 사람이 남보다 크게 뛰어넘는 까닭은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그 해야 할 것을 잘 미루어 갔을 뿐입니다. 지금 〈왕의〉 은혜가 충분하게 금수에게 미치면서도 공이 백성에게 이르지 않는 것은 유독 어째서입니까?
등(滕)나라 문공(文公)이 물어 말하였다. “등은 작은 나라입니다. 힘을 다하여 대국을 섬기더라도 침략을 벗어날 수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옛날에 태왕(太王)이 빈 땅에 살 적에 적인(狄人)이 그곳을 침략하자, 가죽과 비단으로 적인을 섬겨도 침략을 벗어날 수 없었고, 개와 말로 적인을 섬겨도 침략을 벗어날 수 없었고, 주옥으로 적인을 섬겨도 침략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에 그 기로(耆老)들을 불러모아서 그들에게 고하여 말하길, ‘적인이 원하는 것은 나의 토지이다. 내 이에 관하여 들으니, 「군자는 그 사람을 기르는 것 으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하니 그대들은 어찌 임금이 없을까를 근심하는가? 나는 장차 빈 땅을 떠나겠소.’ 하고 빈 땅을 떠나 양산(耆老)을 넘어 기산(岐山)의 아래에 도읍을 정하여 그곳에 거주하셨습니다. 빈땅 사람들이 말하길, ‘어진 사람이다. 잃어서는 안된다.’ 하고 태왕을 따르는 자가 마치 저자로 모이는 듯 〈많았습니다〉.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만일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면 모두 두려워하고 측은해 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는 것이 아니며, 그것으로 향당과 벗들에게 명예를 구하려는 것이 아니며, 비난하는 소리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비록 사람에게 있는 것인들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겠는가? 사람이 스스로의 양심(良心)을 잃은 까닭은 또한 도끼가 나무를 를 만나면 날마다 나무를 베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산이〉 아름답게 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 밤낮의 자라는 바와 새벽의 기운에, 그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본성이〉 다른 사람과 서로 가까운 것이 거의 없는데, 곧 그 낮에 행동하는 것이 본성을 구속하여 없앰이 있으니, 구속을 반복하면 그 밤 기운이 보존되는 것이 충분하지 않고, 밤 기운이 보존되는 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그 금수와 거리가 멀지 않으니, 사람이 그 금수를 보고서 ‘일찍이 그 사람에게 재질이 없었다’ 여길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본 모습이겠는가?
맹자가 말하였다. “한 움큼의 오동나무와 가래나무를 사람들이 만일 기르고자 하면 모두 그 나무를 키우는 방법을 알지만, 몸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키우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 어찌 제 몸을 아끼는 것이 오동나무와 가래나무를 〈아끼는 것〉만 못하겠는가? 생각하지 않음이 심한 〈까닭〉이다.”
맹자가 말하였다. “사람이 〈자신의〉 몸에 대하여 사랑하는 것이 같으니, 사랑하는 것이 같으면 기르는 것이 같다. 한 자, 한 치의 피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 한 자, 한 치의 피부를 가꾸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그 〈기름의〉 잘잘못을 상고하는 방법이 어찌 다른 것이 있겠는가? 자기에게서 잘잘못을 취할 뿐이다.
대개 한 번 이점을 논해보건대, 마음의 허령과 지각은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말한 것은 곧 그것이 혹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고 혹은 본성의 바름에서 근원하여, 지각하게 된 까닭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혹은 위태로워서 불안하기도 하고, 혹은 미묘하여 보기 어렵기도 한 것뿐이다.
애석하구나! 그들이 말한 것이 전해지지 않았으나, 대개 석씨[석돈(石墩)]가 모아 기록한 것이 겨우 그의 문인들이 기록한 것에서 나왔다. 이 때문에 대의는 비록 밝혀졌으나 은미한 말들이 해석되지 못했고, 그 문인이 스스로 해설한 것에 이르러서는 비록 매우 상세하고 빠짐없이 밝힌 것이 많았으나, 그러나 자기 스승의 학설에 어긋나고 노(老)·불(佛)에 젖어 든 것이 또한 있었다.